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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검은 꽃>, 김영하(2012)
    골때리는 리뷰/장편소설 2020. 6. 10. 05:00

     

    <검은 꽃>, 김영하

     

     <검은 꽃>을 읽었다면 김영하의 4분의 1은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이 말은 김영하가 많은 소설을 썼다는 뜻일 수도 있고, <검은 꽃>이란 작품 자체가 김영하의 문학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일단 나는 후자 쪽에 더 의미를 두고 있다. 평소 읽었던 김영하의 소설은 하나의 단편적인 영화처럼 가볍지만 날카로운 느낌이었다면, 검은 꽃은 책 두께만큼이나 두껍고 단단한 바위 하나를 보는 느낌이었다.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밀어젖힐 때마다, 조선인들은 예의와 범절, 삼강과 오륜을 잊고 서로 엉켜 버렸다. 남자와 여자가, 양반과 천민이 한쪽 구석으로 밀려가 서로의 몸을 맞대고 민망한 장면을 연출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조국에 실망한 사람들은 영국 증기선인 일포드 호를 타고 멕시코를 향해 간다. 배에는 농민, 무당, 군인, 심지어는 황제의 일족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승선해 있다. 서유럽에 아메리칸 드림이 있었고, 대한제국에는 멕시코 드림이 있었다. 소설은 이 다양한 이민자들의 삶을 하나하나 추적한다. 다양한 인물이 나오고, 집요하기까지 해서 긴 시간을 두고 읽어야 했다.

     

    그들이 떠나온 나라는 물에 떨어진 잉크 방울처럼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나라는 타국에 의해 부패하고 몰락했다. 이민자들은 멕시코에 있는 동안 끊임없이 조국에 소식을 보냈지만 그들의 부름에 응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또한 4년의 노동 계약이 끝난 후, 이민자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시간은 맞물려서 멕시코에는 혁명이 일어났고, 이민자들은 역사의 뒤편에 묻히게 된다.

     

     작가는 정착된 삶을 갈망하는 인간상을 김이정과 이연수라는 두 인물을 통해 나타낸다. 장돌뱅이로 일포드호에 오르면서 처음 성과 이름을 얻은 이정과, 유서 깊은 양반가에서 자란 연수는 태평양 위에서 연인이 된다. 그 인연은 멕시코 농장에서 노예 노동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지속된다.

     

     김이정은 멕시코 혁명에 참전하고, 동료 한인들과 함께 과테말라 혁명의 용병이 되어 밀림 속에 신대한이라는 국가를 세운다. 정부군의 대대적인 토벌로 인해 이정은 죽지만, 상하이 임시정부보다 먼저 국가를 선포한 역사를 남긴다. 반면 김이정의 아이를 임신한 이연수는 권용준, 박정훈에게 차례로 몸을 빌려 정착된 삶을 향해 나아갔다. 그녀는 박정훈의 유산을 활용해 베라크루스의 고리대금업자가 되어서 정착에 성공한다. 뿌리 뽑히지 않기 위한 김이정과는 대비되는 을 윤리로 삼는 난민적 인간 이연수를 통해 <검은 꽃>은 인간적인 딜레마 역시 재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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