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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백의 그림자>, 황정은(2010)
    골때리는 리뷰/장편소설 2020. 6. 1. 04:00

    <백의 그림자>, 황정은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든 생각은, “빽빽하다였다. 물론 빈 공백을 의도하고 적혀진 문장과 단락, 소설이었겠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공간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영혼이 채워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빽빽하다.

    라는 말의 이미지 사전을 만든다면 아마도 그런 광경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야말로 빽빽하다.

    라고 생각한 뒤엔 아무런 말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눈앞이 빽빽했다.

     

    -백의 그림자, p.102-

     

     <백의 그림자>는 가~마의 다섯 개의 동으로 나뉜 철거 직전의 전자상가를 배경으로 한다. 위의 인용구처럼 많은 사람들이 1~2평 남짓한 공간에 가게를 열어 살아가고 있다. 은교와 무재 역시 각각 전자상가에 있는 가게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들은 처음엔 비즈니스적으로 잘 아는 사이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로의 그림자에 발을 들이밀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이야기다. 본질적으로 이 소설은 연애 소설이 아니라, 난폭한 이 세상에 원래부터 난폭한 세상이었어?”라고 반문하는 소설이다. 그렇다고 두 주인공들이 사회에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가동이 철거되고 난 후 조성된 공원에서 거닐고, 또 아버지가 신문지에 싸온 순대를 먹고 자란 사람들이다. 그저 전자상가를 두고 슬럼이라는 무책임한 단어를 붙이는 언론과 사람들에게 물을 뿐이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백의 그림자, p.115)라고 말이다.

     이 소설의 색은 백()이다. 읽을수록 맑다. 둔하고 낡아 보이는 오무사에서 덤으로 받은 전구에서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날까, 싶을 정도로 맑다. 내가 이때껏 관심을 두지 않은 세계에서는 이렇게 소리의 파장이 보일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희다는 말이 이미 제한적인 뜻을 가진 만큼 세세히 따져 보면 소설의 배경은 투명하진 않다. 오히려 곧 회색으로 변질될 듯한 흰색이다. 그러나 은교와 무재는 남들이 슬럼이라 생각하고, 어두운 색으로 인식하는 그 전자상가를 슬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억울하고 속상하다. 왜 다른 사람들은 빽빽하고, 백 명의 그림자가, 아니 그 이상의 그림자가 모인 이 전자상가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철거하려 그러는 것인지. 작중에서 무재는 가동이 철거된 것을 보고 자신이 일하던 동을 떠나지 않을 거라 말한다. 어차피 나동이 철거되어 다동으로 이동한다 해도 다동 역시 철거될 것이고, 순서대로 라동과 마동까지 언젠가는 사라질 공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사라진다는 제한 때문에 이 소설은 자유롭다.

     

    그처럼 공허하기 때문에 나는 저것이 사람 사는 것하고 어딘가 닮았다고 늘 생각해 왔어요.

    라고 말하며 무재 씨는 주먹만 하게 줄어든 무를 쥔 손으로 마뜨료슈까를 가리켜 보였다.

    기본적으로, 사는 것이 그렇다고 나는 생각해 왔거든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그림자들을 목격하면서, 그런 생각을 조금식 삼켜 왔다고나 할까, (중략).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도 있는 거예요.

     

    -백의 그림자 p.142-

     

     무재는 인생을 러시아의 전통 인형 마뜨료슈까로 생각하고 있다. 무려 스물아홉 개의 각기 다른 표정을 가진 인형을 수용할 수 있는 인형은 사실 속이 비어있다. 까고 까고 까다 보면 결국 마지막 인형을 들춰내면 알맹이가 없게 되어 허망해지는 것이다. 이를 알고 있는 무재는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라고 표현하고 은교에게 들려준다. 무재가 3인칭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3인칭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 나는 헷갈리게 되었다. 우리는 언제부터 타인을, 심지어 자신을 저 위에서 관망하고 있던 것일까.

     모두의 그림자가 일어설 수 있다는 얘기는 나에게 우리가 그림자로부터 벗어난 것이라고 해석되었다. 그림자는 그 자리에 있고, 우리가 스스로 그림자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그림자는 빛에서 비롯된, 가시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잡을 수 없는 비현실에 가까운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그림자의 탓으로 돌린다. 그림자가 스스로 일어서고, 따라가면 안 된다고. 그러나 그림자의 상처가 아니라 스스로의 상처다. 그림자는 사실 애초부터 제자리에 있던 게 아닐까.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백의 그림자 p.144-

     

     이 장면을 좋아한다. 무재는 허망하다 지칭하는 것의 허망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내가 간과한 것은, 허망함이다. 공허에 또 공허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책을 덮은 뒤, 스스로 일어선 그림자를 오래 바라봤다.

     

     

     

    <현대의 멘탈리즘 26호>, 에디터 준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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