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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셋을 위한 왈츠>, 윤이형(2006) "트라이앵글"
    골때리는 리뷰/중,단편소설 2020. 6. 5. 04:00

     

     

    <셋을 위한 왈츠>, 윤이형

     

     이번 소설을 다 읽은 후에는 삼각형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 삼각형은 정삼각형처럼 안정적이지도 않다. 둔각삼각형처럼 한 꼭짓점이 두 꼭짓점보다 멀다. 이 꼭짓점은 꼭 탈주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 꼭짓점은 치유가 될 수 있고, 상처나 절망이 될 수도 있다. 이번에 소개할 윤이형의 <셋을 위한 왈츠>는 삼위일체, 삼각관계, 삼위일체, 삼부작처럼... 미묘한 숫자 3의 스텝을 보여준다.

     "셋이라는 건, 결국 모두가 혼자라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수 같아. 밤중에 혼자 깨어 혼자여서 느끼는 외로움은 어린애의 외로움 같은 거야. 둘이 있어도 외롭다면 그건 처참하지만, 완전한 외로움은 아니지. 둘은 어쨌든 가끔이나마 함께 잠들 수 있으니까. 셋이 되어 나머지 둘이 이미 잠들어 있는 걸 보면서 정말로, 정말로 혼자라는 걸 깨달아야 사람은 완전해져." - <셋을 위한 왈츠>

     소설은 주인공이 심리적인 안정을 위해 음악치료사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하나, 둘, 셋의 이 세 박자에 맞추어 소설은 규칙적으로, 하지만 불안정하게 진행된다. 이렇게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주인공이 가진 상처에 독자 스스로가 첨착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삼각형을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삼각형 안에 갇혀 산다. 엄마와 아빠를 일찍 떠나보내고, 누나와 형까지 같은 날에 영원히 이별했지만 3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삼각형에는 누나와 형의 영향이 크다. 

     보통 우리가 가지고 있는 "3"이란 숫자의 균형을 주인공은 불균형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독자 스스로도 숫자 3의 외로움을 알고 있으므로 소설 속 인물의 상처에 간접적인 동화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작품은 윤이형의 초기작 중에서도 가장 추천하고 싶었던 소설이다. 우리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가진 둔각삼각형을 볼 수 있다. 그 삼각형은 절망과 상처가 가깝고, 치유는 좀 먼 곳에 위치한 둔각삼각형이다. 주인공은 왈츠의 박자처럼 쓰리스텝을 반복하며 치유의 꼭짓점과 나머지 두 꼭짓점 사이의 거리를 좁혀나간다. 그리고 독자 역시 아무리 삼각형 한 꼭짓점이 나머지보다 멀어도 무게중심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p.56-

      할머니는 삼각형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엄마와 아버지라는 두 꼭짓점이 예정보다 훨씬 일찍 먼 영원 속으로 지워져버린 후, 할머니는 균형을 잃은 나머지 한 개의 점처럼 이리저리 떠밀려 흩날렸다. 우리 삼 남매는 모두 할머니 손에서 컸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언제나 조금씩 가슴이 쓰려왔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절 내내 우리 셋이 이루고 있던 삼각형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어서 할머니라는 또 하나의 점은 그저 배경 정도로밖에 바라보지 못했다.



    -p.65-

      음표로 만들어진 미친 강아지 한 마리가 작업실 안을 발광하며 뛰어다니고 있다.

      보이지 않는 털을 온 방 안에 하얗게 날리며 부산을 떨면서. 쇼팽 왈츠 6번D장조 작품 번호 64-1. '강아지 왈츠'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곡의 러닝 타임은 1분 45초에 불과하다. 음악치료사가 말한 대로 세 박자로 이뤄진 왈츠라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다. 그러기엔 너무 정신이 없다. 그저 털이 부숭부숭한 다리로 책상과 의자와 마루와 욕실 문 앞의 러그를 쉴 새 없이 헤집고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강아지 한 마리가 그려질 뿐이다. 아주 자세히 들어보니 강아지의 다리는 세 개인 것 같다. 강약약 강약약 강약약. 저렇게 빨빨거리다간 마룻바닥에 대 자로 엎어지고 말 것만 같은데, 음표로 된 강아지는 비칠거리면서도 세 개의 다리로 잘도 춤을 추며 방 안을 누빈다.



    -p.67-

      형의 사랑스러운 강아지는 죽어도 죽어도 다시 살아났다. 병에 걸리거나 트럭에 깔리거나 더 크고 사나운 개에게 물려 놈은 몇 번인가 세상을 떴다.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았다. 놈이 죽으면, 형은 며칠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똑같이 생긴 개를 구해와서는 똑같은 이름을 붙여 다시 키웠다. 형이 차례로 키웠던 하얀 몰티즈들은 종의 특성상 다 똑같아 보였다. 기껏해야 턱선이 좀더 납작하다거나 두 눈 사이의 간격이 조금 더 넓다거나 하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구별할 수 있는 차이를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형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개가 지닌 개별적인 죽음이라는 한계를 무효화하고, 놈에게 영원 불멸한 생명을 부여했다. 강아지들은 형의 개라는 유일한 존재로 통합되어 영원히 살아남았다. 형은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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