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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요한 사건>, 백수린(2017) "보편적이고 섬세한"
    골때리는 리뷰/중,단편소설 2020. 5. 28. 04:00

    백수린은 <고요한 사건>으로 제8회 젊은작가상 우수상을 시상했다.

     

    보편적이고 섬세한

     

    그들 사이에는 소꿉친구들만 공유하는 친밀감이 있었는데, 그것은 시간이 만드는 대부분의 것이 그러하듯 공고해서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고, 그래서 가끔 나는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외로웠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를 소외했다거나, 내게 거리를 두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 p.130

     

    백수린은 관계를 글로 풀어내기 어렵다고 생각한 필자를 비웃기라도 하듯 기존에 있던 사람과 이후에 합류한 사람 간의 미묘한 심리를 아주 섬세하게 표현한다. 이 심리를 누구나 알고는 있다. 그러나 너무 자연스럽게 겪고 지나쳐버리기 때문에 잘 인식할 수도 없다. 그러나 백수린과 같은 소설가들은 이런 사소하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감정을 구체화시킨다. 필자는 이들을 점성술사라고 표현하고 싶다. 문장이라는 수정 구슬을 통해 우리가 평소 눈여겨보지 않던 것들을 보여주는, 사람들. 이 수정 구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수정 구슬을 본다는 것 자체가 능력이니까. 그러니 소설가들이 없으면 우리는 안다고 생각했던 것조차 잊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쨌거나 너는 공부만 지금처럼 열심히 해라. 나머지는 아빠 엄마가 다 알아서 할게. 서울에 온 것도 다 널 위해서잖냐. - p.134

     

    전학생에게는 친구를 선택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부모님은 미처 알지 못했다. - p.135

     

    소설의 주인공 는 재개발을 노린 부모님의 뒤를 따라 서울로 상경한다. 그러나 예상했던 서울이 아니라 실망한다. 오히려 가 이사한 곳은 더 큰 고향집을 생각나게 할 정도였다. 다행히 운 좋게도 좋은 친구를 만나는데, 그들이 바로 해지와 무호다. ‘는 여중으로 전학을 갔으므로, 먼저 이쪽과 저쪽,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있던 나를 배척하지 않은 유일한 아이였던 해지와 친해지고, 그녀의 소개로 무호와도 함께할 수 있었다.

    는 그냥 평범하게, 부모님 말씀을 따르는 아이다. 그래서 위의 인용된 문장과 같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아파트, 그러니까 잘 나가는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어울리려 애쓰는 일이 너무 피곤했기 때문는 해지와 더 어울렸고, 결과적으로는 해지의 집에서 더 많이 놀았다.

     

    그 집을 떠올리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우리가 현관문을 열 때까지 집안에 고여 있던 어둠과 코를 찌르던 쾨쾨한 자릿내였다. - p.140

     

    해지에게는 내가 그저 삶을 구성하는 한 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당시 나를 때때로 슬프게 했다. - p.141

     

    는 해지의 집에서 그녀가 처한 상황을 마주한다. 그러나 정작 해지는 아무 거리낌 없이 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세상에 상처는 많지만 해지에게 자신의 가정환경은 상처가 아니기라도 한 것일까? 페이지 141쪽에서 해지는 의 눈썹을 정리해준다. 이 일은 둘의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도록 한 결정적인 계기였다. 계층 차이가 어느 정도 있던 둘 사이의 관계를 일시적으로 잊게 한, 우정의 가능성이 보인 사건인 것이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 p.143

     

    는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즐겨했다. 아버지는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마다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찾아가 돼지갈비를 드시기 좋게 살코기만 가위로 잘라드리는사람이었다. ‘의 아버지는 가난한 시골에서 발을 딛고 일어섰다. 그는 언제나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지 않고 안주하려는 것은 잘못하는 일이라고 게 말했다. ‘의 부모님은 그저 아름다운 삶을 원해 상경한 사람들이다. 그럼으로 소금고개 주민들에게 의 가족은 이질적이지 않았을까.

     

    언젠가 한번은 해지였는지 무호였는지 둘 중 하나가 넌 좋은 대학에 가서 부자가 되겠지, 같은 말을 내게 했다. 그런 말을 내 앞에서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해지는 만날 때마다 학교에서 배우는 미용 기술에 대해서, 마네킹의 가발을 자를 때의 고충 같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무호는 우리 사이에 있을 때도 있었고, 없을 때가 더 많았다. - p.147

     

    는 어쩌면 무호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친구였기에,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남자애들 앞에서와는 다르게 유독 무호한테는 짓궂었기 때문에. 그러나 무호가 우정이라는 금기를 깨고 해지에게 고백했을 때, ‘는 무슨 심정이었을까. 왜 모든 것은 나의 상상과 법칙에 어긋날까. 열여덟 살에서 열아홉 살로 넘어가는 즈음의 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 p.155

     

    백수린은 칸딘스키의 동명 그림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한다. / <고요한 사건>, 바실리 칸딘스키(1928)

     

    드디어 소금고개에 재개발 소문이 돌았을 때는 이미 재개발 찬성파와 반대파가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재개발 추진이 지연되자 찬성파 중의 하나가 독극물로 고양이를 죽이는 사건이 일어난다. 또한 동네 고양이들의 캣맘(?), ‘고양이 아저씨가 젊은 사내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기도 한다. ‘는 이 광경을 보고 부모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들은 사태를 해결할 수 없었고(오히려 무관심했다) 부모님 몰래 고양이 사체를 묻어주기로 한 는 집밖으로 나서는 순간 내리는 눈에 모든 것을 잊을 정도로 매혹된다.

     

    눈이 내리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리고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한다. 어쩌면 이 소설은 아름다운 우정에 대해 말하는 소설은 아닐 것이다. 해지가 게 눈썹을 정리해준 것처럼 서로 아름다워지려 하는 것은 삶에 도움이 되진 않는다. 이 소설을 통해 개인적으로 이런 질문을 받은 것 같다. “너는 누구와 친구가 될 수 있냐고, 아름다워지려 하는 너는.”

     

     

    <현대의 멘탈리즘 42호>, 에디터 준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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