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술의 임무>, 배명훈(2018) "서술자의 존재증명"골때리는 리뷰/중,단편소설 2020. 7. 3. 13:53
- 서술하는 자들의 존재증명
동일 작가의 다른 작품인 <안녕, 인공존재!>와 연결된 부분이 많은 작품이 아닐까. <안녕, 인공존재!>에 등장하는 돌멩이 모양의 ‘존재’는 천재 과학자 선우정의 바람에 따라 지구 공전궤도 바깥쪽으로 쏘아 올려진다. ‘존재’는 지구 공전궤도 바깥쪽을 향해 날아가다가 ‘생각’에 빠지게 되는데, ‘나는 의심한다.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 의심한다. 존재한다.’를 무한히 반복하다 결국 존재의 논리에 충돌하고 만다. 그리고 스스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우주적인 폭발을 일으킴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서술의 임무>에서는 어떤가. ‘서술자’라 불리는 화자는 “버림받을 순간에만” 글을 쓰도록 설정되어 있다. 또한 이 서술자는 “학습기계가 아니고 기계학습”을 통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한다.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윤이형)>의 대필 기계가 어떤 문장이든 미문으로 변형시키는 것과 다르게 서술자는 “어째서 상상 따위를 하게 됐을까”라며, 끊임없는 독백과 기록을 통해 스스로를 학습한다. 이를 자기인식이라 할 수 있을까?
기계와 자기인식이라는 말 사이에는 큰 간격이 존재한다. 어쩌면 너무 가깝다. 서술자 역시 ‘존재’처럼 “장엄한 결말”을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있었을까? 나는 증명에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내 독백이 누군가에게 읽히기라도 하는 걸까?”라는 질문의 대답 역시 비슷하다. 내가 읽고 있다. 그것은 큰 영광이다. 아무리 버림받은 순간에만 서술하도록 설정되어 있더라도, 그렇게 서술된 글은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지지 않은가?
(본문 인용: 문학3 2018년 3호 - <서술의 임무>, 배명훈)
Written by. 해링본 골드셔츠
'골때리는 리뷰 > 중,단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무진기행>, 김승옥(1960) "그에게 묻는다" (3) 2020.06.08 ◆ <DJ 론리니스>, 윤이형(2006) "크로스페이더" (4) 2020.06.06 ◆ <셋을 위한 왈츠>, 윤이형(2006) "트라이앵글" (2) 2020.06.05 ◆ <유년의 뜰>, 오정희(1980) "판도라의 새싹" (2) 2020.06.03 ◆ <고요한 사건>, 백수린(2017) "보편적이고 섬세한" (4) 2020.05.28